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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하드SF가 반복 회귀물과 만나면 <철수를 구하시오>

by 환상의나비 2022. 3. 9.

<철수를 구하시오> 표지 (가짜과학자 / 에이시스 미디어)

유머러스한 제목과 표지만 보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셨다면 처음부터 당황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은 밑도 끝도 없이 첫 화부터 운석 충돌로 인해서 지구가 멸망하고,

그로 인행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주인공 '철수'가

다시 운석 충돌 전의 시기로 회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특별하게 만드는 점은

운석 충돌이라는 지구적 재앙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또한 초현실적인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과학적 기술에 의한 해결책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 명확한 목표

모든 서사 작품에는 드라마가 필요합니다.

드라마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프랭크 대니얼 길로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 했습니다.

"누군가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는데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굉장이 어렵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운석 충돌을 막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확한 목표가 있기에 작품은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쭉쭉 뻗어나갑니다.

다만 이는 평범한 인간 1명의 힘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영역이죠.

그래서 일단은 회귀라는 설정을 통해서 주인공이 미래를 알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적어도 운석 충돌이라는 재앙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 보다는 주인공이

앞서서 이를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죠.

○ 회귀물의 공식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주인공에게 몰빵하는 대부분의 웹소설이라면 영웅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혼자서 뚝딱뚝딱 일을 해치우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겠지만,

본 소설은 비록 초현실적인 설정이 붙어있지만 주인공의 능력을 무한대로 그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어려운 미션이 한번의 시도만으로 성취되기는 어렵죠.

그러니까 단순 1회성 회귀가 아니라 반복 회귀 설정이 붙습니다.

마치 보스를 깨기 전에 주인공이 죽으면 동전을 다시 넣고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하듯이,

주인공이 운석 충돌을 막지 못하면 다시 어릴 때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런 반복 회귀물을 또 다른 전형적인 루트는 수없이 회귀를 경험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계속 쌓아 어느 순간 말도 안 되는 과학 혁신을 일으키는 겁니다.

마치 청동기를 거치지 않고, 철기를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도약을 하는거죠.

하지만 이러면 작품이 너무 뻔해지리라고 생각했는지 작가는 다시 한번의 단서를 더 답니다.

'회귀를 하면 이전 삶에 대한 대략적인 기억은 남지만 세부적인 기억은 사라진다.'

이런 설정을 통해서 과학 기술 도약을 통한 먼치킨적인 문제 해결을 아예 봉쇄해버립니다.

그리고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같은 시간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기존 삶보다 뒤의 시간대로 회귀한다는 설정을 부여하여

언젠가는 기한이 있는 회귀물이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판을 깔아뒀으니 이제 문제를 해결하러 가야겠죠.

○ 문제 해결을 위한 팀빌딩

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설정상 주인공이 한 삶에서 도달할 수 있는 성취는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이래로 이어지는 유구한 전통에 따라

결국 자신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들을 모아야겠죠?

이 과정에서 작품은 또 다시 한층 풍부해집니다.

서사에만 힘을 준 나머지 캐릭터의 개성이 떨어지는 작품이 될 수 있었는데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설정으로 인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진거죠.

첫 부분부터 복선을 깔아두는 부분이라 이 동료가 언제 합류할지 보는 과정도 재밌습니다.

○ 과학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또한 기술적 부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언론 분야 등에서도 운석 충돌을 막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을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를 위해서 주인공이 선 정치질을 하거나 선 언플을 하는 부분도 그려집니다.

이에 따라 이전 삶에서는 철천지 원수 같던 사람이 다음 삶에서는 동료가 되는 등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 군상을 그려 나갑니다.

세상 모든 일은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한 분야에서만 뛰어나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에만 미친 듯이 몰두하는 장인을 굉장히 경외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해결되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더라고요.

○ 좋은 작품은 하루 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특히 흥미로웠던 작품으로는 <철수를 구하시오>도 꼽을 수 있었다. 올해 가장 이슈가 된 SF 웹소설이기도 했다.

재치 넘치는 표지로 SNS에서도 많이 회자가 되었다. 이 작가는 이 작품이 이렇게 뜰 줄 몰랐기 때문에,

세이브 원고도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고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쉽게도 뒤로 갈수록 초반에 보여주었던

재미나 구성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부분이 보였다. 심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기간 내 연재된

작품 전체의 완성도와 균질성도 봐야 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으로 최종심에서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반의 몰입감만큼은 압도적으로 탁월하다.

만약 좀 더 많은 준비를 해서 연재를 시작했다면, SF 웹소설 계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 SF어워드 2020 - 웹소설 부문 수상작 및 심사평 - 전혜정 작가 심사평>

위의 심사평에서 알 수 있듯이 <철수를 구하시오>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연재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창기 인터넷 플랫폼에 별 준비없이 올렸던 글이 굉장히 히트를 치자

작가가 장기 연재를 하였으나 결국 연재가 계속됨에 따라 퀄리티도 떨어지게 되죠.

본래 연중하고 재연재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책임감에 일단 끝까지 연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재를 마친 후에 기본 설정을 남긴채 중후반부를 완전히 갈아 엎은 리메이크작을 쓴 겁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다 보면 재밌는 장면들이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카카오 페이지 같은 플랫폼의 경우 작품만 바뀌고,

댓글들은 바뀌지 않아 같은 편에서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두 댓글이 나란히 베스트에 오른다던지.

그럴 때면 리메이크 이전 버전이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참고로 제가 작성한 글은 오로지 리메이크 버전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설정과 도입부를 가지고도 연재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연중하거나,

후반부에 무너져 내리는 작품이 수없이 많은 이 시대에

이런 케이스는 확실히 그런 작가들에게 귀감이 될만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리고 결국 좋은 작품은 하루아침의 벼락 같은 영감이 아니라

꾸준한 연마를 통해서 나온다는 점도 알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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