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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니체와 토리노의 말, 그리고 밀란 쿤데라

by 환상의나비 2021. 6. 30.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에 하나로 꼽히는 니체지만, 그의 인생 말년은 상당히 불우했습니다.

 

1889년 니체는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다가 문득 한 장면에 시선이 꽂히게 됩니다.

 

토리노의 광장에 말 한 마리가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 모습이였죠.

 

아무리 마부가 채찍질을 해도, 그 말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본 니체는 달려가서 말의 목을 껴안고 엉엉 울다가 쓰러졌습니다.

 

몇 일간 침대에서 죽은 듯이 누웠있던 니체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고 하네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 라고...

 

이 때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세상을 떠났다고 봐도 될 겁니다.

 

그 후에 그는 10년 동안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가족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하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짧은 이야기가 니체의 위대한 철학과 사상들만큼이나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벨라 타르 감독, <토리노의 말>

 

어찌나 큰 영향을 미쳤던지 무려 2012년에도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첫 도입부에서부터 위에 설명된 니체의 이야기를 나레이션으로 전달해주며 시작합니다.

 

영화 내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작품이죠.

 

이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니체가 토리노의 말을 보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뜬금없게도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이 있습니다.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죄와 벌>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죠.

 

똑똑하지만 가난한 탓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 좋은 머리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시작한 주인공은

 

비범한 인간은 살인에 대한 압박감조차 이겨낼 수 있으며, 그게 영웅의 자질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인물 중에 제일 기생충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기로 결심하죠.

 

살인을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짜던 주인공은 아래와 같은 악몽을 꾸게 됩니다.

 

'여윈 말은 숨을 괴롭게 몰아 쉬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그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본 소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군중 속을 헤치고 말에게 달려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붙잡고 말의 눈과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런 후 일어서서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미꼴까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주인공의 꿈에 나타난 '여윈 말'은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전당포 노파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 위대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몰아붙이는 주인공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당연히 죄와 벌도 읽었겠죠.

 

그래서 토리노의 광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말을 본 순간 그 무의식이 떠올랐다는 겁니다.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움직이고 않고 버티는 토리노의 말의 모습에서

 

위버맨쉬, 초인 사상을 주장하는 자신을 대입하게 되어 그렇게 감정이입을 했던 거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해석한 예술가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밀란 쿤데라에요.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는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데카르트를 끌고 옵니다.

 

 

르네 데카르트

'인간은 소유주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동물이 신음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소연이 아니라 작동 상태가 나쁜 장치의 삐걱거림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의 목을 껴안고 울었던 일을 데카르트와 완벽히 상반되는 행동으로 간주합니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서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위의 구절만 보면 그 행동에 대한 평가가 조금 모호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메세지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은 자기와 비슷한 대상인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인간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뤄진다고 봤습니다.

 

그가 보기에 데카르트가 주장한 'machina animata'는 인류의 지성을 끌어올렸을지언정

 

도덕성을 말살 시키는데 기여한 사상이고,

 

반대로 니체가 토리노의 광장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런 인류에 대한 속죄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렇게 보자면, 아마 니체가 마지막으로 제정신일 때 말했다고 전해지는

 

"어미니, 저는 바보였어요." 라는 말은 뒤늦게야 그런 점을 깨닫게 된 성찰의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뭐... 사실 니체가 다시 환생해서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영원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지만 ㅎㅎㅎ

 

하지만 여러모로 생각해볼만한 논제를 던져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토리노의 말은 앞으로도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변주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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