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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밀란 쿤데라 - <농담>

by 환상의나비 2021. 3. 22.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정신적 태도라든가 꾸며낸 행동과 몸짓들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단번에, 준비도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수많은 가짜 얼굴들 뒤에서 눈먼 사람들처럼 늘 길을 더듬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3부 루드비크, 119P>

 

-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던 주인공이 농담으로 적은 편지의 한 글귀로 인해 당에서 축출되고, 시베리아 유형을 와서 외출을 나갔다 극장에서 만난 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느꼈던 감정.  

 

여러 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나는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던 동기를 수십 가지는 늘어놓았지만, 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 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그 당시 우리는 정말로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을 실제로 결정했다.

(...)

우리가 맛보았던 그 도취는 보통 권력의 도취라고 불리는데, 나는 그러나 (약간의 권리로) 그보다 좀 덜 가혹한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든 일에 여러가지 면이 있듯)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산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렸던 초원이 펼치지고 있었다.  <3부 루드비크, 124P>

 

-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라타지 못한 삶은 가치 없는 삶이라고, 시베리아 유형과도 같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아이러니 하게도 시베리아 유형에서 사소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이어서 세상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에 자기 고유의 이성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7부 루드비크, 헬레나, 야로슬라프, 483P>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자에 대한 복수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 개인의 삶이 역사의 무게에 얼마나 쉽게 바뀔 수 있는지,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것이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을 희롱하는 농담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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