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해할 수 없는 일과 어찌할 수 없는 일 (부조리, 실존 그리고 기생충)

by 환상의나비 2020. 9. 16.

기생충에 쏟아졌던 찬사들을 잠깐 다시 되돌아 봅시다.

 

전례 없는 영화라는 세간의 평가가 마냥 호들갑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작품은 고평가 받을 만하죠.

독창적인 발상과 적절히 뿌려진 맥거핀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웃기다가도 씁쓸하게 만드는 대사는 블랙코미디의 극치를 보여주고,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계단따라 아래로만 내려가는 탈출씬의 서스펜스는

 

왠만한 스릴러 이상의 긴장감을 조성하여 심장이 터질 정도로 요동치게 만듭니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정재일 음악 감독이 휼륭하게 역할을 수행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를 암시하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는 계속 반복되며 관객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빛을 적재적소에 사용한 아름다운 영상미는 비극적 순간에 사용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하네요

이건 홍경표 촬영감독의 힘이 컸을 것 같군요. 

 

 

<기생충>의 프랑스판 포스터입니다. 익숙한 눈 가린 포스터 대신 굳이 이 포스터를 택한 이유는 글의 후반부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감상하고 나온 사람들에게 이 모든 요소들은 그다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중 대부분이 송강호가 이선균을 상대로 마지막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그리고 그 행동은 이해 받을 수 있는 행동인가 토론하기에 바빴으니까요.

 

 

 

 

이런 의견의 차이는 보통 시나리오는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죠.

 

교과서적인 분류법을 따라서 시나리오를 구분하자면, 보통 2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사에 중심을 둔 시나리오냐, 혹은 인물에 중심을 둔 시나리오인가?

 

 

시나리오 분류의 2가지 방법 1. 서사 중심 2. 인물 중심

서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작품은 사건이 시나리오를 끌고가는 동력이 되며,

 

연출보다는 각본에 더 힘을 주고 사건의 배치와 인과에 더 중점을 줍니다.

 

그리고 관객들이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감상하도록 유도하죠.

 

 

반대로 인물 중심으로 진행되는 작품은 내적 갈등에 더 무게를 두고,

 

연출에 더 공을 들여서 화면 너머로 인물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도로 유도합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주인공이 어떤 기분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영화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법칙이며,

 

대부분의 좋은 작품들은 사건과 인물의 균형을 매우 적절하게 분배하긴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생충이 미세하게나마 캐릭터에 좀 더 무게를 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건 위주로 작품을 받아들이던 관객들이라면 후반부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죠.

 

그런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말이 안 된다' 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이런 경우를 좀 문어제적으로 하자면, 우리는 '부조리'하다고 말합니다.

 

기생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이 부부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조리 3번 뜻을 보면, 뒤쪽 부분이 이상하게 끝난 점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예술 혹은 철학에서의 부조리는 좀 더 나아간 의미를 가지고 있죠.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해서 실존주의적 용어라고요.

 

하지만 추가로 있는 정보는 제가 글 전개를 위해서 임의로 좀 잘랐습니다.

 

저 잘린 글에서 언급되는 사람이 썼던 책의 도입부가 참으로 충격적이거든요.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시포스>  티치아노 베첼리오

다들 잘 아시겠지만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는 죽음을 피하게 위해서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감금한다던지,

 

그 죄로 지옥 문턱까지 가서도 아내가 노잣돈을 넣어주지 않았다면서 호소해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수명만큼 살다가 다시 지옥으로 갈 정도로 신들을 우습게 보며 여러 번 기만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명이 다해서 그가 죽었을 때, 신들은 벌을 내리죠.

 

바위를 산 정상까지 올려 놓으라고. 하지만 산 정상에 바위를 올려두는 순간 바로 돌을 굴러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빠진 것이죠. 아무런 희망도, 목표도, 의미도 없는 짓만 반복하는 겁니다.

 

 

카뮈는 이처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의 삶의 모든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카뮈가 새롭게 정의한 부조리라는 단어는 현대의 모든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희극에서는 부조리극이라는 하위 장르가 생길 정도로요.

 

<고도를 기다리며> 사뮤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명사와 같은 작품입니다.

 

문학사에서 절대로 빼먹을 수 없는 상징적인 희곡이죠.

 

하지만 그냥 유명세만 믿고 집었다가는 엄청나게 당황하게 될 겁니다.

 

이 엄청난 걸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을 끌고 가는 사건은 진짜 오로지 무의미한 기다림 뿐이거든요.

블라디미르: 내일 다시 와야 할 테니까
에스트라공: 뭣하러 또 와?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리러.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사이)안 왔냐?
블라디미르: 안 왔다
블라디미르: 우리는 행복하다
에스트라공: 우리는 행복하다. (침묵) 이제 우리는 행복하니까, 이제 뭘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잘 된다고? 왜?
블라디미르: 자네 그 꼬마가 하는 얘기 못 들었나?
에스트라공: 못 들었네.
블라디미르: 그 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작중 내내 인물들 간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흩어질 뿐입니다.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지만 결국 고도는 등장하지도 않죠.

 

그래서 처음 공연 됐을 때는 극도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시간을 이겨내고 명작의 위치에 오른거죠.

 

사람들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력한 개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습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파격적인 구성의 작품이 어떻게 그런 찬사를 받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20세기 초반의 시대상, 그리고 실존주의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가?

20세기 초반은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붕괴시키던 시기였습니다.

 

기술들의 놀라운 발전은 무기의 첨단화로 인해 열강들의 식민지를 놓고 싸우는 경쟁 구도를 만들어 냈고,

 

산업화는 부를 가져다 줌과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는 인간 소외를 부추기며 아노미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속출했죠.

 

그리고 이에 대해 결정타를 날린 것은 2번의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니체가 외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종교 시대의 종결 선언이 아니라,

 

모든 가치관이 붕괴 시키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갈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대두되었던 것이 실존주의죠.

 

철학적 영역까지 짚고 넘어가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될 수 있는한 문학적-예술적 부분에 대해서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

실존주의의 탄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는 단연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특히 그가 말년에 창조해낸 인물들은 기존의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상식에 대한

 

파괴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정말로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명석하지만 가난한 고학생입니다.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가난이라는 무게에 짓눌릴 것 같던 그는 머리를 엉뚱한 곳으로 굴리기 시작하죠

 

그는 해로운 인간을 죽여서 그 돈으로 수많은 선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정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며,

 

그런 일은 죄책감과 두려움 같은 보편적 상식을 초월할 수 있는 영웅들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럽던 그는 매춘부로 일하며 가장 노릇을 하는 소냐의 가정을 보고 나오며 말합니다.

“정말로 인간이라는 것이 전부, 다시 말해 인류 전체가 다 비열한 놈인 것은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머지 것은 모두 편견이요 조장된 공포일 뿐, 장애물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뜻이며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에 한계를 두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죠.

 

살인 후 수사망이 조여온다는 압박감, 자신이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절망감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평범함을 탓할지언정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원칙을 죽인 것이다! 나는 원칙을 죽였지만, 도저히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아직 이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일 줄만 알았을 뿐이다.”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그리고 그의 유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인공 역할은 3명의 형제는 마치 프로이트의 이드, 에고, 슈퍼 에고를 인간으로 형성화 한 것 같은 인물들인데

 

-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평가하며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

 

그 중에서 에고(이성)의 역할을 맡은 이반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합니다.

 

프로이트가 문학사상 가장 압권이라고 말한 대심문관에는 이런 구절도 나오죠.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아무것도 없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의지라는 가치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보수의 화신 같은 사람이고, 전통적 가치관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죄와 벌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방황 끝에 결국 구원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죠.

 

 

그런 부분에서 카뮈는 훗날, 부조리극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진정한 부조리극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죠.

 

 

몇몇 작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의 독자적 길을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프란츠 카프가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항상 원인도 알 수 없는, 부조리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엄청나게 큰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변신>
“누군가 요제프 K.를 모함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 <심판>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 놓였지만, 비정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계속 삶을 살아갑니다.

 

이해할 수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모습은 실존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죠.

 

실존주의가 존재하기도 전에, 썼던 그의 작품들은 훗날 부조리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게 됩니다.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이처럼 정돈 되어 있지 않던 부조리를 다룬 작품들을 집대성하여 실존주의를 체계화 시킵니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내부나 외부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고독하게 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여, 신의 부재를 가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인생의 무의미함에 절망하며 방황하죠.

 

실존주의가 낳은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구토>의 주인공 로캉텡은 그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공원도 도시도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알게 되면 속이 울렁거리고 모든 것이 가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구토가 치민다.”

하지만 방황의 끝에서 로캉텡은 레코드판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남아있는 가수의 목소리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고 실낱 같은 희망을 찾아냅니다.

“내가 갈망하는 저 ‘무’에서 나를 끌어내는 것이 바로 ‘나’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증오와 권태가 나를 존재시키는 방법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 넣는 방법인 것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격언인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기준을 정하도록 두지 않고,

 

자신만이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죠.

 

 

하지만 앞서 언급한 알베르 까뮈는 부조리를 중시하면서도 이와는 조금 다른 노선을 취합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실존주의의 끝에서 시작한다고 말했죠.

 

그의 대표작 <이방인>은 시지프 신화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의 충격적인 구절로 시작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처럼 어머니의 죽음조차 무의미하게 받아들이는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바로 그 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수욕장을 가고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치정 싸움에 휘말려서 한 아랍인을 죽이게 되죠.

 

많은 사람들이, 햇살이 눈 부셔서 죽였다는 말 때문에 주인공이 진짜 사이코패스인가 생각을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보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도록 미묘한 문장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중략>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사람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을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뫼르소가 태양이 눈 부셔서 그를 죽였는지, 햇살에 비친 칼날 때문에 그를 죽였는지는 작품 내내 명확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심판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의 과거 행적으로 그의 행동을 마음대로 판단하죠.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사망한 바로 그 다음날에 이 사람은 해수욕을 하고, 난잡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희극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린 것입니다.”

결국 공정치 못한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주인공은 그에게 회개를 권하는 신부에게 일갈 합니다.

“너의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특권은 죽음말고는 달리 해석할 수 없겠죠. 

 

카뮈는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서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인간상을 창조 해냅니다.

 

이는 결국 시지프 신화와 이어지죠.

 

카뮈는 희망이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돌을 정상에 올리는 시시포스를 놓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

어차피 부조리한 세상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그저 당장 눈 앞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먼 길을 돌아서 다시 기생충으로 돌아왔군요.

 

앞서 나왔던 기생충의 프랑스판 표지입니다.

 

영화 내용상으로는 지하실에 숨어살던 전 가정부의 남편이 발견되어 대소동이 벌어지고, 

 

간신히 수습이 되려는 찰나 이선균 가족들이 귀가하여 기적적으로 도망쳤더니,

 

폭우로 집이 잠긴 후 주인공 가족들이 집을 나와 체육관으로 향하는 시기 정도가 되겠죠.

 

눈을 가린 한국의 기생충 포스터가 미스테리 하다면, 이 포스터는 어찌할 수 없는 재해에 대한 무기력함이 느껴지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는 인생, 반지하와 고층 주택과 방수 텐트로 대변되는 계층의 격차는

 

한낱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수해민들을 모아놓은 체육관에서 엉망이 된 상황에서 기택과 기우 부자는 서로 전혀 다른 대처법을 보여주죠.

 

기우(최우식)는 지하실의 부부를 처리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반대로 기택(송강호)은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송강호는 대만 카스테라 파동 같은 경험을 겪으며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송강호가 기생충에서 보여주는 캐릭터는 4명의 가족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피자 포장지도 못 접고 구박 받을 정도로 4명 중에서 제일 하자 있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인물이죠.

가족들이 모여서 이선균-조여정 가족이 떠난 집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을 때,

유일하게 자신 때문에 짤린 기사를 걱정하는게 송강호입니다.

집이 홍수로 침수 됐을 때, 아내의 메달을 챙기는 모습은 또 어떤가요?

송강호의 캐릭터는 인간이라는게 숨만 쉬고, 밥만 먹고 사는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기생충 같은 삶을 살면서도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거죠.

 

그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제일 비인간적인 살인이라는 행위도 저지르는게 아닌가 싶어요.

 

지하철 냄새 등으로 극 중 내내 꾸준히 쌓여왔던 분노의 감정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비 내린 후의 맑고 화창한 축제날의 순간,

 

역치를 넘어서 이선균을 대상으로 폭발하게 되는거죠.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이해 받을 수 없는 부조리한 행동이지만, 부조리한 세상의 구조가

 

송강호의 행위를 납득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송강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걸 이해하게 만들 정도로 세상이 부조리하니까요.

 

 

엔딩씬에서 최우식은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집을 사서 갇혀 있는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반지하의 집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카메라는 그 꿈이 이뤄질 수 없는 환상이라고 보여주는 듯하죠.

 

 

이 부조리한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환상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 앞에 놓인 일을 하는 것 지금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껴뒀던 시지프 신화의 한 구절을 붙이며 글을 끝내고자 합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나 영원에 대해 희망이나 기대를 갖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