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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라딘> 주도적 여성 캐릭터라는 함정

by 환상의나비 2022. 3. 13.

○ 들어가기 전에

 

보통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개인의 역량보다

 

영화 제작사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디즈니는 대표적으로 제작사의 입김이 강력한 작품들이 많죠.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 <스내치>, <셜록 홈즈> 등으로  유명한 가이 리치가

 

디즈니 실사판을 감독을 맡기는 했으나, 본 작품에 가이 리치의 색채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디즈니 전반적인 제작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작품에 대한 내적인 내용을 보기 전에 일단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봐도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2019년에 개봉한 알라딘 실사판은 상영 시간이 128분이지만,

 

반대로 원작 애니메이션은 겨우 90분입니다.

 

실사화 과정에서 무려 38분의 러닝타임이 늘어난거죠.

 

 

 

 

그러면 이렇게 엄청 늘어난 러닝타임을 디즈니 실사판은 뭘로 채웠을까요?

 

오리지널 캐릭터도 몇 명 나오긴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쟈스민 캐릭터의 변화일 겁니다.

 

기존의 쟈스민이 자유분방하고 아직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소녀 같은 공주라면,

 

실사판의 쟈스민은 정치적 야망이 넘치는 진취적인 혁신가처럼 그려지죠.

 

 

이건 두 캐릭터가 결혼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일단 둘 다 왕국에서 원하는 신랑감과의 결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건 같습니다.

 

그런데 원작 쟈스민은 그 이유가 사랑없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면

 

실사판의 쟈스민은 자신이 왕이 된다면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를 듭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자연히 쟈스민 분량도 늘었고, speechless 같은 테마곡도 새로 제작됐군요.

 

 

자, 그러면 시대에 변화에 발 맞추어 여성 캐릭터의 성격도 바꾸고,

 

러닝타임 늘려서 분량도 늘렸고, 

 

간지나는 테마곡도 붙여줬으니,

 

디즈니가 굉장히 멋진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겠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양반들은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라는 설정만 만들 줄 알았지

 

그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능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 "아이들이 굶고 있잖아요."

 

 몰래 궁을 나온 쟈스민이 시장을 방황하다가 알라딘과 만나는 건 원작과 실사판이 같고,

 

그리고 배고픈 아이에게 몰래 빵을 주다가 걸려서 곤욕을 치르는 장면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똑같이 전개가 되어도 되는 걸까요?

 

원작의 순수하지만 철없는 공주 쟈스민이 화폐나 거래의 개념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왕좌를 노리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설정의 실사판 쟈스민은 다르게 행동하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나마 원작에서는 쟈스민이 '술탄이 돈 줄거에요 ;;ㅎㅎ' 이런 식으로 무마하려 들기라도 하지

 

실사판에서는 오히려 "굶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못본 척 하나요?" 하면서

 

마치 자기가 잘못한게 없는 것처럼 군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더 이 쪽이 세상물정 모르는건가 싶더군요.

 

 

아무튼 이런 장면 덕분에 실사판 쟈스민은 작품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설정과의 괴리를 가지고 시작하게 되는겁니다.

 

 

○ "그 곳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라에요!"

 

알라딘과 쟈스민의 짧은 만남이 끝난 후에 배경은 궁궐로 옮겨갑니다.

 

악역인 자파가 술탄을 상대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그리고 조금 늦게 쟈스민이 회의에 참석하고, 자파가 침략하자고 하는 곳이 자기 어머니의 나라인 것을 확인합니다.

 

바로 쟈스민이 이에 반대되는 의견을 냅니다.

 

그런데 이유가 좀 묘하더라고요.

 

"어머니의 나라를 침략하자는 건가요?"

 

 

아니 물론 쟈스민 개인에게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일 겁니다.

 

그런데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저런 식으로 중대사를 결정하는게 설득력이 있는지는 고민해봐야겠죠.

 

최소한 "전쟁을 일으키면 백성들이 고통을 받아요!" 이런 대사가 있었다면

 

뻔한 갈등 구도라도 납득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조국이라는 이유로 반대한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죠.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오르겠다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개인적 이유에 의해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시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정치인 지망생' 쟈스민 캐릭터는 스크래치를 받게 됩니다.

 

 

 

○ "나는 침묵하지 않아."

 

speechless는 알라딘 실사판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한두번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기존 원작에 없었는데 쟈스민 캐릭터를 위해서 새로 만든 곡이고,

 

작중 여러번 변주되어 나오고,

 

자파가 램프를 훔친고 소원을 빌어 왕의 자리에 오른 뒤에

 

그와 대립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온갖 화려한 연출을 쏟아부어서 강조해주는 곡이기도 합니다.

 

가사부터가 자신을 억압하는 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곡인만큼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실사판 쟈스민 캐릭터를 상징하는 곡이죠.

 

 

그런데 speechless를 부르며 자파와 쟈스민의 대립하는 장면에서도 저는 의아함이 들더군요.

 

자파가 먼저 '자기는 이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겠다'고 자신의 논리를 펼칩니다.

 

그러면 뭔가 쟈스민도 그에 대응하는, 명분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자파가 '나는 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너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뭘 아냐?'

 

이런 식으로 쟈스민을 공격해서 곤란하게 만드는 장면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고전적이더라도 쟈스민이 부국강병의 논리에 반대하는 장면으로,

 

'국민이 원하는 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지 군사력이 강한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그러면 서로의 캐릭터가 지향하는 바가 드러나고 

 

동시에 여성 쟈스민이 아니라 정치인 쟈스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멋지게 spchless 부른 후에 하는 말이

 

'당신이 바라는 것은 자기 욕망 실현 뿐이고, 절대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디스 몇 줄로 상황이 정리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실사판의 '야망가 쟈스민' 캐릭터가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 왕위 등극

 

자파로 인한 문제가 해결 된 이후에 원작도, 실사판도 작품의

 

마지막 순간에 쟈스민과 알라딘은 사랑에 빠지지만 결혼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걸림돌이 있습니다.

 

바로 공주는 왕자랑만 결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지니가 알라딘이 쟈스민과 결혼하기 할 수 있도록 마지막 소원을

 

'자기를 왕자로 만들어줘'라고 말하라며 권유할 때 나오는 명대사가 그 유명한 'genie, you are free'.)

 

 

물론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둘이 결혼에 골인하지만 그 과정에 차이가 있는데

 

원작은 둘의 사랑을 본 술탄이 감동 받아서 법을 개정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실사판에서는 쟈스민이 직접 술탄의 자리에 오른 후에 법을 개정하여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사람들이라면 '실사판 쟈스민이 왕위에 오른 나라는 과연 괜찮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야망만 있고, 비전과 현실 경험이 극히 부족한 공주가 만들어 가는 나라가

 

과연 행복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사족

 

어쩌다 보니 여성 캐릭터를 엄청 열심히 까버렸는데,

 

저는 정말이지 주도적이고 멋진 여성 캐릭터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멋지고 주도적인 여성상을 만든다면서 나오는 캐릭터들을 보면 의아함이 먼저 들어요.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주도적이고 멋진데' 여성인 캐릭터인거지,

 

그냥 작중 내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늘려서 주인공급으로 만드는게 아닌데 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주인공 나우시카가 아직까지도

 

위대한 캐릭터로 남아 있는 까닭은 단순히 작중에 가장 오래 등장하고 중요한 역할을 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공존의 희망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제가 보기에는 비중은 늘었지만 설정과 하나도 안 맞는 행동만 하는 실사판의 쟈스민 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중은 적고 주도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눈 딱 감고 자파를 유혹해서 시간을 버는걸로 결국 1인분을 해내는

 

원작의 쟈스민이 차라리 더 멋진 캐릭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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