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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만화의 연재 시스템이 만들어 낸 걸작

by 환상의나비 2021. 4. 17.

<데빌맨>의 원작 만화가로 유명한 나가이 고가 얼마 전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감에 쫓기면서 눈앞의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50년이 지났다." 라고요.

 

언제부터 정립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화라는 매체는 대부분의 경우 연재를 합니다.

 

 

물론 <로지코믹스>나 <하바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결이 된 채로 나오는 만화도 있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정기 연재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처럼 12년동안 7권이 나온 작품도 있습니다만.

 

로지코믹스 : 버드런트 러셀의 삶과 학문적 성취, 그리고 격변기를 함께 살아간 학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
하비비 : 12살에 중년의 남자에게 팔려가다시피 시집가게 된 여자 주인공과 노예 시장에서 만나게 된 남자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생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 전쟁으로 인해 유독 물질로 가득해진 세상, 다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왕국의 공주 나우시카의 이야기

 

<소년 점프> 같은 대표적인 만화 잡지를 표함하여 대부분의 만화 플랫폼들은 주간 연재를 합니다.

 

그래서 마감에 치여서 미친 듯이 야근하는 만화가, 그리고 어떻게든 마감 날짜 전에 원고를 받으려고 하는

 

편집부의 눈물나는 노력 등은 만화하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죠.

 

심지어 출판 만화가 아니라 웹툰이 주류가 된 지금 시점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런 주간 연재 시스템은 작품의 퀄리티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처음부터 결말을 결정하고 완성된 상태로 내놓는 작가와

 

매번 머리를 싸매면서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 작가의 출발선이 같을 수가 없겠죠.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만화가들은 우선 연재를 따내기 위해서, 그리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연재 초반부에 피치를 엄청 끌어 올리다가 연재가 길어질 수록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작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시점이 오는거죠.

 

물론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주간 연재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의도한대로 결말을 내는 작품들도 보기 드물게 나오긴 합니다만...

 

만화가를 지망하는 콤비를 그린 메타 만화 <바쿠만>을 보면 이러한 만화가의 애환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끝을 정하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것이 반드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역으로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제가 오늘 설명하고자 하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오른쪽이

기생수 만화 혹은 애니를 보시지 않은 분들도 다음 캐릭터는 어디선가 한번쯤 본 적이 있으시지 않나요?

 

그 정도로 아주 긴 시간 기억되고, 후대의 만화에 큰 영향을 미친 캐릭터입니다.

 

기생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인간의 신체에 침투한 후 뇌에 차지하여 그들의 육체를 조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신이치도 같은 일을 겪을 위기에 처했으나, 그 기생 생물이 뇌에 닿기 전에 팔을 꽉 묶어 이를 막는데요.

 

그로 인해서 뇌에 닿지 못하고 오른손에 기생한 생물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도 서로 부를 이름은 필요하니 뭐라고 부를까 고민하다가, 오른쪽이라고 부르게 되죠.

 

 

이 작품 역시 다른 만화들처럼 연재가 되었던 작품이었고, 다른 만화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작가는 완결 후 후일담을 보면 기본적으로 언제 끝낼지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처음에는 3부작 단편으로 끝내려고 했던게 결국 단행본 10권 짜리 작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분량보다 더 큰 변화는 이 작품의 근본적인 주제 의식 그 자체입니다.

 

작품의 초반부를 보면 이 작품은 마치 지브리의 원령공주 절망편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구를 파괴하는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합니다.

 

기생수 도입부

 

첫 도입부부터 지구의 미래를 지켜기 위해서 인간의 수를 줄일 목표로 기생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오른쪽이는 신이치에게 악마에 가장 가까운 생물은 인간인 것 같다는 말을 하죠.

 

작가의 후일담에도 다음과 같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기생수 1화를 그릴 무렵, 세상은 지금처럼 이콜리지 무드에 젖어 있지도 않았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 시끄럽지도 않았다. 즉, '어리석은 인간들이여'하고 외치는 인간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화 첫머리에서는 인류 문명에 대한 경종이랄까, 그런 분위기로 시작을 했다.

 

그러나 연재를 계속하게 되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주제와 비슷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이러한 추세 속에서 기존의 주제를 유지해서는 차별성이 없겠다고 생각한 작가는 기존의 구상을 바꿉니다.

 

그런데 차차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놓고 떠들어대기 시작하니 도리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들과 같은 말을 작품 속에서 복창하는 것이 창피했던 것이다. 청개구리 심보일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번엔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따위는 인간이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만화는 일차원적인 인간 사회 비판을 통해 환경 보호를 외치는데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인간다워지는 오른쪽이와 점점 더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신이치의

 

절묘한 구도에서 나오는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서로 함께 지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둘은 서로를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이런 장면이 나오죠.

 

 

길에서 만나 알게된 생물이 문득 돌아보니 죽어 있었다. 그럴때면 왜 슬퍼지는걸까?

그야 인간이 그렇게 한가한 생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최대의 강점이라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생물,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정작 인간이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물음에 대해, 인간도 아닌 오른쪽이가 해답을 내놓는 장면입니다.

 

길에서 알게된 동물에게도 감정 이입하고, 공감하고, 그 죽음에 슬퍼할 수 있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처음에는 인간을 가장 악마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했던 캐릭터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변화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정주행 하다보면 그 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위화감 없이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블레이드 러너>가 생각나더라고요.

 

인간의 유전자를 본따서 만든 인조 생명이 인간 이상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느꼈던

 

그 아이러니함이 이 만화에서도 똑같이 느껴졌습니다.

 

 

만약 기생수라는 작품이 연재 만화가 아니라 결말까지 전부 정해서 나오는 작품이었다면 이런 장면은 볼 수 없었겠죠.

이 장면은 순전히 작가가 끝없이 스토리를 변경하며 만들어 낸 장면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기생수 만화는 기형적인 연재 시스템이 만들어 낸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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